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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of-date/board_HB

陰雨

No : 109
Name : ice cap

1. 여름이란
계절은 참으로 사람이 그저 무던히 살 수 없게 만드는 계절인가 봅니다. 오늘은 진짜 여름같은 날이었죠. 삼복염천 중에 태어난 탓인지 어지간한 더위에는 찬바람을 갈망하지 않는 저로서도 오늘은 그 무던함에 손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렇지만 그러한 손상이 전부 날씨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 어쩌면 일종의 피해자인지도 모르겠군요. 일기에 예민한 자들의 신경질의 연쇄반응에 운없게 연루된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2. 사세한
일들에 대해서는 각설하기로 합니다. 사소한 짜증거리야 늘 도처에 널려있으니 신경을 끄면 그만이라는 것쯤은 저도 아니까요.
그런 것들을 뒤로 하면 오늘 하루는 유별나게 재기가 돋보이는 애인10호의 황당하기까지한 소설들을 읽으면서 한껏 쾌청한 기분을 가질 수 있었더랬습니다. 

3. 그러다가
저녁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서울의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문자메시지를 한통 받았죠. 모르는 전화번호가 찍혀 들어온 그 메시지는 이렇게 적혀있더랬습니다.
"아까 길에서 봤을 때 예쁘게 하고 왔더만 어디가는 길이냐. 017-xxx-xxx"
길에서 보다? 온종일 학교에 있다 그제서야 나가던 참이었으니 그 길이란 학교길이 겠고, 확실히 예쁘게 하고 온 건 맞으니까(흑흑, 이래서 제가 친구가 없나 봅니다) 이것은 나를 타깃으로한 메시지가 분명할진대, 공일칠 어쩌구하는 숫자상의 그를 나는 모른다. 그러잖아도 협소한 인간관계에 이정도 친근한 말투로 문자를 보낼 인사이면 내가 분명 친분을 두고 있는 사람이 확실하다 여겨, 전화번호가 바뀌었나 보군 싶어서 모르는 번화에 감히 전화질을 해댔습니다.

4. 넌 누구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짐작했습죠.
몇 주째 (비록 연속적이진 않지만은) 짬이 날때마다 제 애를 태우던 친구녀석이더군요. 나우누리에서 통신친구로 만나 학교가 같은 탓에 거의 매일 단짝처럼 붙어다니던 친구였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한참 감정적으로 힘들 때 만나서, 그의 극진한 간호 덕에 지금 인간 꼴을 갖추고 있는 지라 저에겐 둘도 없이 각별한 친구이죠. 그런 친구와 사소하달 수도 있는 다툼 비슷한 것(사실은 다툼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만..) 때문에 관계에 위기를 맞고 있었죠. 실지로 사건이 있은 후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으니까요. 제 홈에 미안하네 어쩌구 했던 글들은 다 이 친구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그가 평범치 않은 친구이고 결벽적이라 할 수 만큼 흰 마음을 가진 친구이기에 상당한 위기에 봉착했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5. 그렇게
당황스런 위기를 맞아서 이젠 끝인가 보다고 체념하고 있을 때에 그의 천연덕스럽기까지한 상냥한 목소리에 저는 그저 안도의 숨을 내 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손전화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문자는 친구의 전화를 빌려서 보낸 거라는 말에 '그래 너도 내가 보고싶었겠지' 하고 속으로 흐뭇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죠..그리고 그럼 내 지금 어델 가는 길이니 이따 밤에 통화하자는 말을 건넸는 데...다음 순간 전 여지 없이 배신당하고 말았죠. 저의 착각으로 부터 말입니다.

6. "하지말라, 필요없다" 하며
다부지게 저의 제안을 거절하는 친구. 그 상냥한 전화목소리가 갑자기 가증스러워 지는 것은 왜인지...그럴꺼면 뭣하러 문자를 날린건지..남의 사 어찌하고 어딜 다니는지...허 참....어이가 없기도 하고 갑자기 짜증스러워지기도 하고......여름을 타는 예민한 사람 탓에 괜실히 나만 바보가 되는 구나 싶어서 버럭 신경질이라고 부리고 싶었으나 지하철 안의 수많은 사람을 의식이 되기도 하거니와, 그런 류의 반응엔 영 익숙치 않은 탓으로 그저 싱겁게 "그럼 그러지 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7. 집에 와서
찬찬히 생각해 봐도 이거 영 새 됐다는 기분이 들어 찜찜하고, 제가 워낙이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건 저 자신도 아는 바, 그의 "하지마"가 기실은 "꼭 전화해"하는 반어가 아닐까 하고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중입니다. 역시 여자를 다루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8. 그녀의 말이
무엇을 함의하고 있건간에 오늘 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아니할 듯한 친구가 원망스러운 것만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 친구가 짜증스러고 미워지려고 까지 하는 데는 별 도리가 없을 듯 싶습니다.
내 스스로 너무나 쉽게 인간 관계에서 적극성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나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하기사 생각한다 생각한다 하면서도 지금의 저는 그렇게 한가하지만은 아닌지라, 어디까지 심사숙고할 여지가 생기련지는 미지수입니다만.....

9.이렇게 열 뻗치는 날에는
얼음모자나 눌러쓰고 잠들어야 겠군요.
전 정말이지 평범한 친구들 곁에서 평범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서 주워 들은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방법
1) 냉장고에 있는 커다란 수박 한 통을 꺼낸다.
2) 그것을 절반으로 자른다.
3) 절반은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머지 절반의 속을 흰 부분 보일 때까지 다 파 먹는다.
4) 흰부분과 파란 부분만 남은 것을 냉동실에 넣어 둔다.
5) 더울 때 그걸 꺼내서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있는다.(히히.. 얼음모자..)

10. 여기는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도피처이며 안식처입니다. 도피처...후..그렇습니다. 심경이 하도 답답해서 진심을 털어놓지 아니하면 스스로 정상성(sanity)을 유지할 수 없기에 뻘소리 좀 하다 갑니다. acre님 그 이름만치나 멋진 마음으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날은 화창하나 제 마음은 장마군요..
"철겨운 비는 추근추근하게도 내리고, 길은────,그의 걷는 길은 어디까지든 질었다……." 박태원의 단편,<음우>~eyepopping


이상 faneyes 였습니다.